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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제주의 실험' 히트펌프 10만 대, 전력시장 바꾼다
송고일 : 2026-03-16
'제주의 실험' 히트펌프 10만 대, 전력시장 바꾼다 / AI 이미지
[투데이에너지 임자성 기자] 히트펌프를 단순한 난방 설비로만 보면 절반만 보는 것이다. 전기를 소비해 열을 만드는 이 장치는 관점을 바꾸면 전력망의 신호에 반응하는 유연성 자원이기도 하다. 전력이 남을 때 더 가동하고 부족할 때 잠시 멈추는 것만으로도 사실상 발전소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특별자치도가 3월 12일 발표한 ‘생활영역 열에너지 전기화 대전환 계획’이 이러한 원리를 10만 대 규모로 실증하겠다는 선언이라면 , 기후에너지환경부와 한국전력공사가 하루 뒤인 3월 13일 공개한 ‘계절·시간대별 전기요금 개편안’은 그 선언을 현실로 구현할 제도적 인프라에 가깝다.
재생에너지가 넘쳐도 버려진다
제주는 전체 발전량의 약 20%를 재생에너지로 생산하는 지역이다. 전국 평균인 10.6%의 두 배에 이르는 수준이다. 그러나 이 수치는 또 다른 역설을 품고 있다. 태양광과 풍력 발전이 동시에 증가하는 날이면 전력망이 이를 감당하지 못해 발전을 강제로 멈추는 ‘출력제어’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제주만의 현상이 아니다. 전국적으로도 출력제어는 빠르게 늘고 있다. 2023년 2회에 불과했던 출력제어는 2025년 82회로 41배 증가했고, 제어량 역시 같은 기간 0.3GWh에서 109.4GWh로 365배 급증했다. 재생에너지 공급이 늘어나는 낮 시간대 소비는 억제하고 밤 시간 소비를 유도하는 기존 요금 체계가 더 이상 재생에너지 시대의 전력 구조와 맞지 않는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히트펌프가 전력시장 자원이 되는 세 가지 경로
히트펌프가 전력시장 자원이 되는 구조는 크게 세 가지 층위로 설명된다. 첫 번째는 수요반응(DR)이다. 히트펌프는 공기 중의 열을 끌어다 쓰는 설비이기 때문에 수십 분 정도 가동을 중단해도 건물에 축적된 열 관성 덕분에 실내 온도가 즉각 떨어지지 않는다. 이 물리적 특성이 전기 소비를 잠시 미루거나 조정할 수 있는 유연성의 기반이 된다. 제주도 계획은 이를 ‘플러스 DR’ 개념으로 구체화했다. 태양광 발전이 집중되는 낮 시간대에 히트펌프를 적극 가동하면 소비자가 보상을 받는 구조다. 출력제어로 버려질 전력을 난방에 활용하고 그 기여에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방식이다.
두 번째는 가상발전소(VPP)다. 개별 히트펌프 한 대의 전력 용량은 수 kW에 불과하지만 이를 ICT 플랫폼으로 묶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제주도는 2035년까지 히트펌프 10만 대를 네트워크로 연결해 약 1.5GW 규모의 VPP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는 국내 대형 원자력발전소 단위 용량에 맞먹는 규모다. 실제 발전이 아니라 소비의 조절을 통해 계통을 안정화한다는 점에서 형태만 다를 뿐 기능적으로는 발전소와 유사하다.
세 번째는 P2H(Power to Heat)다. 이는 전력을 열로 저장하는 방식이다. 배터리가 전기를 전기로 저장한다면 히트펌프는 전기를 열로 변환해 건물이나 온수 탱크에 저장한다. 태양광 발전이 과잉 공급되는 낮 시간에 히트펌프를 가동해 온수 탱크를 채워 두면 저녁 피크 시간에는 추가적인 전기 소비 없이 온수를 사용할 수 있다. 배터리 없이도 에너지를 시간적으로 이동시키는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요금제 개편, 히트펌프 DR의 경제적 엔진이 켜지다
히트펌프가 DR과 VPP 자원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참여 유인이 필요하다. 그 경제적 기반이 이번 전기요금 개편안에서 처음으로 구체화됐다. 기후에너지환경부와 한국전력공사는 낮 시간대(9~15시) 요금을 최고요금 구간에서 중간요금 구간으로 낮추고, 저녁 피크 시간(18~21시)은 중간요금에서 최고요금으로 조정하는 방향으로 시간대 구분 기준을 변경했다.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낮에는 전기를 싸게 쓰고 화석연료 발전 의존도가 높은 저녁에는 상대적으로 비싸게 쓰는 구조다.
요금 조정 폭도 적지 않다. 밤 시간대 요금은 kWh당 5.1원 인상되는 반면 낮 최고요금은 여름·겨울 16.9원, 봄·가을 13.2원 인하돼 평균 15.4원 낮아진다. 여기에 출력제어가 빈번한 봄(3~5월)과 가을(9~10월) 주말·공휴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는 요금을 50% 할인한다. 이 시간대에 플러스 DR까지 적용될 경우 전력 가격은 평일 최고요금의 20~30% 수준인 kWh당 31~50원 수준까지 낮아질 수 있다. 낮 시간에 히트펌프를 적극 가동할수록 경제적 이익이 커지는 구조다.
주택용 히트펌프 요금제 선택권 확대와 육지 적용
주택용 히트펌프의 요금 적용 기준도 이번 개편에서 개선됐다. 기존에는 히트펌프를 설치하더라도 일반 주택용 누진 요금이 그대로 적용돼 전기 사용량이 늘어날수록 요금 부담이 급격히 증가하는 문제가 있었다. 개편안은 소비자가 세 가지 요금제 가운데 가장 유리한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현행 누진 요금을 유지하거나 히트펌프 가동 전력만 별도 계량기로 분리해 누진이 없는 일반용 요금을 적용받는 방식, 또는 계절·시간대별 요금제를 선택하는 방식이다.
특히 공기열 히트펌프가 올해 3월 재생에너지로 법적 인정을 받으면서 기존에 지열 설비에만 허용되던 일반용 요금 적용이 공기열 설비까지 확대된 점도 중요한 변화다. 또한 제주에만 시범 적용되던 주택용 계절·시간대별 요금제를 육지에서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이는 기후에너지환경부의 ‘난방전기화 보급 사업’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제품을 설치한 가구를 대상으로 한시적으로 먼저 적용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2026년 2,380가구에서 2035년 1.5GW VPP로
제주의 실험이 성공한다면 히트펌프의 위상은 전력시장 안에서 근본적으로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계통 자원을 제공하는 ‘프로슈머’ 모델의 열 버전이 현실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3월 12일 제주도의 10만 가구 보급 로드맵과 3월 13일 정부의 요금제 개편은 각각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서로를 보완하는 구조다.
산업용 수요자 역시 이번 요금 개편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산업용(을) 적용 기업의 약 97%에 해당하는 3만 8,000여 개 기업의 전기요금이 인하될 것으로 전망되나, 밤 시간대(경부하) 요금이 소폭 인상된 만큼 기업별 조업 패턴에 따른 분석이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이번 요금제 개편은 제주의 히트펌프 보급 실험이 단순한 기기 설치를 넘어 2035년 1.5GW 규모의 가상발전소(VPP)라는 거대 에너지 자원으로 확장되기까지, 민간의 참여를 이끌어낼 실질적인 경제적 동력을 제공하는 조치로 평가된다.
[핵심 용어 설명]
ㆍP2H (Power to Heat): 남는 전기를 히트펌프를 통해 열 에너지로 바꾸어 저장하는 기술
ㆍVPP (가상발전소): 흩어진 소규모 에너지 자원들을 ICT 기술로 묶어 하나의 발전소처럼 통합 관리하는 시스템
ㆍ플러스 DR (수요반응): 전기가 남는 시간에 소비를 늘리면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
ㆍ출력제어: 전력망 안정화를 위해 재생에너지 발전을 강제로 중단시키는 조치
ㆍ산업용(을): 광업 및 제조업 등에 종사하는 계약전력 300kW 이상의 고압 전력 사용자
